한 그루 고목처럼 박 안 복| 본회 회원, 수필가, 대안정공 대표이사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불난 집을 발견하였다. 불길이 막 번지고 있었다. 순간,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때 의용소방대장을 지냈던 그는 미처 어디다 연락할 겨를도 없이, 물 한 양동이를 몸에 끼얹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단신으로 불을 잡아보겠다고 애쓰다가 왱왱거리는 불자동차 소리를 듣고 기절하였다. 그는 바로 내 매형, 일흔 넷의 노구였다. 매형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연로하여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으나 기적같이 회복하였다. 물론 적잖은 시간이 걸렸고, 누님의 지극한 간호가 있었다. 평소 꾸준한 등산으로 단련된 체력과 정신력 또한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5년이 흘렀다. 추석을 맞이하여 매형을 만나러 갔던 나는 깜짝 놀랬다. 처남이 왔노라구 전하는 누님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이 낯설어 하였다. 내가 무어라구 말을 하면, '아, 그래요.' ‘제가 잘 모르는 일인데요.’ 하면서 존대를 붙이는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누님의 그제서야 조용히 일러주었다. 매형에게 치매가 왔다고. 나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나에게는 유일한 매형이었다. 중화상을 입어 그토록 고생을 하였는데, 이제 또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로 치매에 걸리다니…. 가끔은 온 정신이 들 때도 있지만 거의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다만 성당 가는 길만은 잊지 않고 잘 찾아다닌다고 하였다. 그 이듬해 설날, 매형이 걱정돼서 다시 누님댁을 찾았다.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치매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낫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었다. 아내인 누님만을 알아볼 뿐 자식들도 몰라보는 지경이었다. 자식은 몰라도 아내는 알아본다니 부부의 인연이란 그토록 깊은 것인가, 황망 중에도 가슴이 뭉클하였다. 치매를 앓으면서도 매형은 일가친척들의 대소사에 가끔 참석하였다. 집안에만 갇혀 있다시피 하는 남편을 위한 누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작년 아버님 제삿날,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중절모를 쓴 매형을 만났다. 깔끔한 차림새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새삼 콧날이 시큰하여 바라보니 매형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애 같았다. 잘 알지 못하여 서먹서먹한 집에 가서, 잔뜩 긴장하여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밴 채로 어머니 무릎에 얌전히 않아 있는…. 매형은 참으로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특히 내게는 유난히 너그럽고 따뜻하였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형이 아우에게 하듯이 나를 귀여워하였다. 어릴 때 놀러가면 번번이 손에 용돈을 쥐어주었고, 내가 청년기에 접어들고 부터는 술집에도 곧잘 데리고 갔다. 어느 해 겨울이었던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나란히 찾아간 술집에서 따끈한 정종에 어묵을 함께 나누어 먹던 매형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자식들이 다 커서 출가한 뒤로 누님네도 늙은 내외만 남아 호젓하였다. 가벼운 나들이에 도란도란 이야기도 정다우련만, 매형이 그만 정신이 흐려져서 말도 잃고 움직임마저 자유롭지 못하니, 가뜩이나 빈 둥지 같은 집안이 더욱 적막해졌다. 말은 물론 웃음조차 잃어버리고 멍하니 앉았는 매형은 한 그루 늙은 나무 같았다. 푸르른 시절을 다 보내고, 가지에 깃들었던 새들도 다 떠나버린 후 차츰 메말라 가는 고목. 그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단단했던 굵은 둥치도 속절없이 삭아서 제풀에 쓰러지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형의 치매 증상이 기억의 끈을 놓았을 뿐, 발작을 한다거나 가출을 한다거나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망각의 세계로 떠났을 뿐, 주변에 또 다른 괴로움은 끼치지 않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내 친구 가운데 한 집안의 장남인 사람이 있다. 그의 부친이 치매로 고생을 하면서 그의 고생도 함께 시작되었다. 어른이 뜬금없이 가출을 하는 통에 온 식구가 나서서 환자를 찾아다니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부친이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속이 까맣게 타고, 간신히 찾아서 집에 모셔다 놓으면 또 언제 집을 나갈지 몰라서 불안하였다. 그런 시간이 길게 이어지자, 아니할 말로 ‘에이, 차라리 돌아가셨으면’하는 푸념도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그럴 것이다. 집안에 불치의 환자가 있으면 가족들의 갈등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더구나 치매 노인을 보살펴야 하는 가족들은 큰 부담과 고통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하고 때로는 최소한의 자유까지도 억압해야 한다. 환자를 보살피는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환자를 괴롭히는 가해자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 마음 고생이 오죽하랴. 사람은 누구나 세월을 따라 늙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점점 고령화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노인문제는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일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인의 건강과 복지에 대해 깊이 연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를 잊어버린 사람, 배 고프면 먹고 졸리우면 자는 본능만 남았을 뿐 사랑도 미움도 모르는 사람, 가엾은 내 매형이 어느 날 거짓말처럼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면 누구를 제일 먼저 만나고 싶어할까? 시각장애자였던 헬렌켈러 여사가 했던 말이 생간난다. 그가 만약 30분만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면 첫째는 자연을,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을, 셋째는 바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싶다고 하였다는데 매형은 무엇이 우선일까? 하긴 지금의 망각 상태가 그에게는 편안한 휴식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매형의 큰딸이 불행하게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넉넉지 않은 시골로 시집가서 알뜰살뜰 증조모까지 모시며 효부상을 수상했던 그녀가 제 몸에 병드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억척스레 살림을 일구던 딸자식이 간암으로 쓰러진 줄을 알았다면 매형은 아마 딸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말았을 것이다. 끔찍히도 친정 부모를 생각하고 챙기던 큰딸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줄을 모르는 매형이 어쩌면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매형은 이제 이름표를 달고 다닌다. 혼자 집을 나섰다가 혹시 길을 잃을지도 몰라서 누님이 어린애 같은 지아비의 옷섶에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는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주일마다 성당에 간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성당 가는 길만 외고 있는 매형,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 천국행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 그 얼굴이 동심인 듯 천진해 보인다. 욕심도 미움도 깨끗이 털어버린 해맑은 얼굴이다. 찬바람에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로 묵묵히 겨울을 기다리고 섰는 한 그루 고목처럼…. 어느 날 그가 홀연히 먼 길을 떠난다 해도 말년의 그 고요하고 쓸쓸한 모습은 내 마음 속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